들꽃이야기-억새풀
강우근
들녘은 가을걷이가 끝나서 텅 빈 듯 하고, 산자락은 잎을 다 떨구고 속살을 훤히 드러냈다. 거기는 이제 억새 세상이다. 초겨울 바람에 바삭바삭 말라 가는 언덕 위에도 억새가 하얗게 일렁인다. 솜털을 나부끼는 억새가, 한겨울이 오기도 전에 꽁꽁 얼어버린 우리 가슴을 쓸어 줄 것처럼 정겹고 푸근하다.
억새, 정겨운 풀이름이 너무 억세고 거칠다. 하지만 습기 없는 팍팍한 땅에서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그 습성이 이름 그대로이다. 또 억새가 아직 푸르름을 간직했던 시절 그 날카롭고 억센 잎새에 손가락을 베어 본 사람은 억새라는 이름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그 잎새로 풀 싸움을 했던 이들에겐 억새라는 억센 이름이 오히려 정겹다.
그런데 이젠 억새와 갈대조차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다. 억새와 갈대는 습성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억새와 갈대는 사는 곳이 다르다. 갈대는 억새처럼 건조한 곳에서는 살 수 없다. 바닷가나 강가, 늪 둘레 같은 습지에서만 살아간다. 억새와 갈대는 이삭 모양도 다르다. 갈대 이삭은 억새보다 갈색이 짙다. 털이 붙은 씨앗은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려서 이삭 줄기만 앙상하게 남고 만다. 억새 이삭 줄기는 우산살처럼 뭉쳐나는데 갈대는 띄엄띄엄 난다. 억새 줄기는 속이 비어 있지 않지만 갈대는 줄기 속이 비어 있다. 바람이 불면 억새는 바람에 너울거리지만 갈대는 줄기가 억세서 나부끼지 못한다.
억새는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뿌리를 내렸다. 건조한 곳에서도 자라는 습성을 써서 시가지 빌딩 둘레 녹화용으로 심어졌는데 이젠 그곳 사람들의 친근한 풀이 되어 압화나 드라이 플라워로 쓰인단다. 억새는 사료로 쓰였고 초가 지붕을 이을 때 짚 대신 쓰이기도 했다. 요즘은 넓은 억새 밭을 조성해서 관광 상품으로 만든 곳이 많다. 정월대보름 같은 때에는 쥐불을 놓아 또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예전에 들불은 민중이 품는 분노와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이젠 그저 어른들이 하는 퇴행적인 불놀이쯤으로 되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노동자 삶은 팍팍해지고 가슴은 바짝 말라 버렸다. 노동자 가슴은 마른 억새처럼 불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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