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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문화 노동자 강우근

by 한량이 되고싶다 2021. 4. 6.

일일학습 고3 게시판에 그림과 글을 쓴

문화 노동자 강우근은....

 

프로필

1963년생 출판미술가
1995년 ~97년까지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현
장에서 미래를'에 만평 연재
1996년 ~2001년 까지 '작은책' 삽화 및 표지작업
2002년 ~ '노동자의 힘' 삽화 연재, 포스터 작업, 집회 상징물 
작업 
2003년 ~ 어린이 진보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연재

 

만화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 강우근

시간은 지난 삶과 지금의 나 사이를 깊게 갈라놓았다.'지난 삶'은 대부분 기억 너머로 가라 앉아 버리고 조각조각들만 드문드문 떠올라 엉망으로 뒤엉켜 있다. 이것조차도 다시 얘기하려니 내 주관적 생각에 의해 다시 짜여져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 버리기 십상이다.

어떤 때에는 그 일들이 현실에서 겪었던 것인지, 꿈을 꾸었던 것인지 조차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몇 년 전부터 아이를 키우며 육아일기를 쓰다 보니 그런 것을 새삼 더 느끼게 된다. 불과 3, 4년 전 일인데도 지난 일기 속에 적혀 있는 그때 일들이 생소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구체적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기억 가운데는 내가 겪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믿기지 않은 일이 많다. 그런데도 본의 아니게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만화에 관련된 지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읽는 이여, 이런 걸 감안하여 읽어 주시기 바란다.

한 십 년쯤 간격을 두고 세 가지 기억이 떠오른다. 

첫 번째 기억...

중학교 1학년 때일 게다. 집에 놀러온 친구들이 책상 속에 있던 내가 그린 만화를 훔쳐보았다. 화장실에 간 사이 꺼내 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빼앗아 모두 찢어 버렸다. 내 못된 성질머리 탓이기도 했지만 내가 그린 만화를 남이 본다는 게 못견디게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 전부터 내가 그린 만화는 교실 뒤 학급신문 란에 몇 차례 연재되기도 했고, 연말에는 카드를 그려서 팔아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남들이 내 그림을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 조바심쳐야 했고, 별 의미 없는 한마디에도 심하게 상처받곤 했다. 그래서 더욱 내가 그린 만화나 그림을 남에게 보이는 게 힘들었다.

찢어버린 그 만화는 제법 매수가 많았는데, 형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만화 작법>이란 책을 보고, 제도 잉크에 펜을 찍어가면서 몇 달 동안 참 열심히 그린 거였다.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내용이 남한테 보이기는 유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숙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이고 싶은 사춘기 시절에 감추고 싶은 치부를 친구들한테 들켜 버린 것이다. 혹시 내가 그린 만화가 그럴 듯했다면 친구들이 은근히 봐 주길 바라며 눈에 띄는 곳에 던져두었을 게다. 그 후론 만화를 그렸던 기억이 별로 없다. 만화 그리기가 시들해진 것은 아마도 만화를 풀어내는 구성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포기했던 것 같다.

두 번째 기억...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이다.(86년 3월 말)

나는 남영동에 있는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취조를 받았다. 만화나 영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작업하고 전망을 고민했던 일 때문이었다. 형사들은 사무실에 있던 자료들을 가져다 분류하고는, 내가 조사받던 방으로 만화나 '공활' 때 썼던 그림일기를 들고 왔다.
한 형사가 그걸 읽다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네가 노동자의 삶을 아느냐?"

노동자의 '노'자도 모르는 먹물들이 성실하게 일하는 노동자를 꼬드겨서 인생을 망친다는 것이었다. 노동운동하다가 걸려서 징역 갔다가 오면 노동자는 취직도 안되고 그 길로 막노동판 신세가 되고 말지만, 먹물들은 그걸 밑천으로 '민주화투사'도 되고 '정계입문'을 할 수 있는 화려한 경력도 된다는 것이었다. 또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이 시들해지면 다 이 사회의 기득권으로 돌아간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형사는 제 말에 취해 울분을 토하며(?) 광분했다.

"네가 그린 이런 만화를 정말 네가 노동자의 삶을 알고서 그린 것이냐?"

그 형사는 노동자에 대한 그림을 그리려면 노동자를 제대로 알고 그리라고 했다. 그저 한두 달 '공장활동' 하고선 노동자를 노동자들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그리는 '얼치기 그림'을 그리지 말라고 했다.

참 명쾌한 '리얼리즘 예술론' 명강의였다. 입만이 아닌 온몸과 그 밖의 여러 도구들을 사용하며 '리얼'하게 진행되었던 그 강의는 나를 전율(?)시켰다. 얼치기 그림이나 만화를 그린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때처럼 만화를 그리고 그림을 그린다는 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만화나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그때 많이 꺾여 버렸다.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 -혁명- 그 자체를 현실적으로 회의했던 것도 같다. 그 후로 만화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나는 공장에 취직했다.

(얘기가 너무 비장했나? 하지만 그땐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세 번째 기억...

1993년 3월, 대통령 취임 즈음해서 이루어진 특별 사면 조처로 만기 3일을 앞두고 나는 출소했다.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함께 운동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운동을 언급하면 한심한 퇴물 취급을 받는 분위기였다. 사실 내 마음은 이미 먼저 무너져 있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밖에는 없었다. 어떤 목적이나 방향을 가진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93년 기을쯤인가부터 지금 만화를 그리고 있는 유승하, 최호철과 함께 '길찾기'를 모색하며 몇몇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때 진형 형도 처음 만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 갈 길을 가라, 남이 뭐라든!"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하는 것'을 해 보자는 적극적인 생각이 조금씩 생겨났다. 어린이 책 그림도 그리고 간간히 신세졌던 민가협 요청이나 노조 부탁으로 그림을 그려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한때 유승하, 최호철, 조남준, 박향미 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 작업실을 꾸려 생활하기도 했지만 내가 그들처럼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96년 여름쯤인가부터 <현장에서 미래를>이라는 잡지에 만평을 연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만화가가 아니라며 극구 사양했지만, '그래도 네가 우리보다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느냐"라는 말에 자신감을 갖고 시작했던 것이다.

이젠 최근 얘기를 해야겠다.

'노동만화네트워크'를 만났다.

'노동자의 힘' 기관지에 만평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만화'는 나에게 여전히 높기만 하다.

그런데도 만화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게 참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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