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잣나무나 한 그루 >>
-김남주
내 안에 비수 하나 있었다 그걸 꺼내
독점과 폭정의 심장을 찾아
밤의 거리를 헤매었던 시절이 있었다
나에게는 한때나마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 그 무렵 내 나이는 팔팔한 나이
조국과 전선의 이름으로 내 모든 것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다짐할 줄 알았던 좋은 때였으니
그날 밤 나는 얼마나 벅찬 가슴이었던가!
그것은 그러나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날 밤 나와 함께 밀폐된 방에서 투쟁의 칼을 세워 놓고
승리 아니면 죽음을! 맹세했던 동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승리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나는
그를 찾아 지금 무덤으로 가고 있다 그와 나란히
비수를 품고 밤길을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신향식 동지---
사형대의 문턱에 한 발을 올려놓고
고개 돌려 그가 나에게 했던 말 그것은
죽으면 내 무덤에 잣나무나 한 그루 심어다오
그뿐이었다
나는 지금 그의 무덤 앞에 와 있다
어엿하게 장성한 그의 아들과 함께
소복을 입은 그의 부인과 함께
무덤가에 한 그루 나무를 심고
그 밑에 예의 비수도 하나 꽂아놓는다
그날 밤 우리가 다짐했던 맹세
승리 아니면 죽음을! 가슴에 되새기며
그렇다 이 나무는 동지의 나무다
민족의 나무 해방의 나무 밥과 자유의 나무다
사람들아 서러워 말아라 이 나무 밑에서
죽음에는 나이가 없는 법이다 역사에서 위대한 것은
승리만이 아니다 패배 또한 위대한 것이다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것 그것은 싸우는 일이니
그것을 다른 데서 찾지 말아라
찾아라 이 나무 밑에서 칼과 피의 나무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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